추억에세이2014.11.03 07:30

 

개명신청삼청동의 가을 (캐논 400D)

 

김선아, 현빈 주연의 내 이름은 김삼순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한국판 브릿지 존스의 일기라고 해야 하나? 파티시에인 통통한 삼순이와 재벌남 현빈의 알콩달콩한 사랑이야기가 주 테마다. 워낙 유명했던 드라마인지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 같다. 벌써 10년이 다 된 드라마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고, 드라마 속 김삼순은 자신의 이름이 너무 촌스럽다고 생각해, 희진이라는 이름으로 개명을 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끝내 개명을 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현빈 같은 남친을 만나게 됐으니 굳이 할 필요는 없겠지. 암튼, 여기에 나오는 '개명신청', 나도 했다.

 

그렇다고 내 이름이 김삼순은 아니다. 부모님이 지어주신 참 예쁜 이름이다. 종로에서 유명하다는 작명소에서 큰 돈을 주고 지었다고 하니, 예쁘고 의미도 좋은 이름이다. 그런데 굳이 개명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있다. 자신의 원래 이름이 있었는데, 반주를 거하게 하신 할아버지로 인해 이름이 바뀌게 됐다는 라디오 사연을 가끔 접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나 역시 살짝 비슷하다. 우리 할아버지께서 반주를 하시지는 않았지만, 한자어를 잘못 아셨다는 게 문제였다. 한글로는 작명소에서 지어준 이름이지만, 이름의 마지막 한글자가 다르게 등록이 되어 버렸다. 예를 들자면, 빼어날 '수(秀)'가 원래 한자였는데, 물 '수(水)'로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이름을 공개할 그날을 기다리며, 오늘은 가명…^^).

 

호적등본이나 주민등록등본을 보면 다르게 나온 한자로 인해 불편할 거라 생각하겠지만, 그냥 서류상만 다를 뿐, 사람들에게는 빼어날 수라고 알려주면 그만이었다. 요즘은 사인을 주로 하지만 어릴 때 통장을 만들거나, 가끔 도장이 필요하게 되면 한문이 아닌 한글로 만든 도장으로 사용하면 되었다. 그렇게 살아왔다. 인감증명서를 만들 때까지 말이다. 적금이었나, 주식이었나, 아무튼 뭘 하려고 했는데 인감증명서가 필요했다. 갖고 있는 도장은 한글 도장밖에 없었고, 왠지 인감도장이라고 하면 좀 있어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도장가게에 가서 비싼 보이는 녀석으로 도장을 만들었다. 한글이 아닌 한자로 말이다. 물론 水가 아닌 秀로 말이다. 그리고 동네 주민센터에 가서 "인감증명서 만들려고요"라고 했다. 직원은 친절하게 필요한 서류에 기입하라고 알려주고 나는 거침없이 이름, 나이, 주민번호 등등 적은 후 드렸다. 그리고 나의 한자 이름이 예쁘게 찍힌 인감증명서를 받을 거라는 상상을, 직원이 쏙 먹어 버렸다. "저기, 서류에 나와 있는 이름이 도장과 다르네요. 이럼 인감증명서를 못 만들어요."

 

즉, 서류상에 나와 있는 물 수로 인감증명서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단지, 딱 한글자만 다를 뿐인데, 뭐 이리 깐깐하지 싶었다. "저 원래 도장에 나와 있는 이 이름이 진짜인데, 이걸로 만들면 안되나요? 그냥 한글자만 다르잖아요." 결과는 절대 안 된다는 거였다. 거금을 들여서 도장도 새로 만들었는데, 다시 서류상의 이름으로 된 도장을 만들까라고 생각했지만, 솔직히 물 수가 들어간 이름이 너무 싫었다. 그때,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이 생각났고, 개명신청을 하기로 맘 먹었다. 결과적으로 그냥 도장을 새로 만들어서 하는 게 훨씬 더 편했을 거 같은데, 일이 너무 커져 버렸다.

 

집에 와서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니, 예전보다 개명신청이 많이 쉬어졌다고 하고, 타당한 사유만 제시하면 어렵지 않다고 하기에, 부모님에게 "나 개명신청 할꺼야. 이젠 물 수로 살 수 없어"라고 통보를 하고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인터넷으로 개명허가 신청서, 개명신고서, 인우보증서는 쉽게 다운 받을 수 있었다. 개명허가 신청서는 왜 개명을 해야 하는 그 신청이유는 써야 하는 문서다. 자기소개서라고 보면 될 듯. '그냥 불리는 이름으로는 굳이 상관이 없는데, 공적인 서류를 제출할 때는 이름이 잘못됐다고 매번 고쳐야 했다. 부모님이 예쁘게 지어준 이름을 다시 찾고 싶다'라는 내용으로 이유를 작성했고, 작명소에서 준 이름에 대한 뜻풀이가 담긴 종이를 캐논 400D로 선명하게 촬영한 후, 붙여 넣었다.

 

개명신고서는 말 그대로 개명을 하겠다는 신고서다. 개명자와 신고인이 본인이니깐, 이름, 주소, 연락처, 주민번호 등 비어있는 공란에 다 채워 넣으면 된다. 업체에 맡기지 않고 직접 하기에, 하나하나 검색을 하면서 기입을 했다. 접수할 때 실수하면 다시 해야 하기에 꼼꼼히 살펴보면서 했었다. 참, 개명신고서에 현재의 이름과 개명하고자 하는 이름을 쓰는 란이 있는데, 잘 보고 기입해야 한다. 순서가 바뀌게 되면 도루묵이 될 테니 말이다.

 

인우보증서는 역시 말 그대로 보증서이다. '위의 사실이 틀림이 없으며 만일 후일에 본 건으로 인하여 문제가 있을 때에는 보증인 등이 법적 책임이 지겠기에 이에 보증함'이라고 참 무섭게 표현하는 구나 했다. 두 명의 보증인이 필요한데, 부모와 친인척은 안 된다고 해서 지인들에게 부탁해서 했던 거 같다. 보증이란 말에 당황했었지만, 돈과 관련된 보증이 아니라고 말하고 받았던 거 같다. 따로 서류를 보관하고 있지 않아서, 누가 해줬는지 솔직히 모르겠다.

 

이 외, 주민등록등본, 주민등록초본, 가족관계증명서 본인, 부, 모 각 한 부씩, 개명신청 하나 하자고 이렇게나 많은 서류들이 필요한지 몰랐다. 여기까지는 주민센터가서 돈 내고 받아오면 되고, 서류는 다운로드 받아서 작성하면 되니깐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런데, 가장 당황스럽고 놀랐던 서류가 하나 있었다. 바로 '범죄경력회보서'다. 개명신청에 무슨 범죄경력회보서가 필요하나 싶었는데, 죄를 짓고 몰래 살고 있는 누군가가 자신의 존재를 감추기 위해 개명신청을 할 수 있기에, 꼭 필요한 서류였다.

 

 

개명신청개명신청하는데, 경찰서는 왜? (소니 nex-3n)

그런데 이 범죄경력회보서는 주민센터에 가면 안 된다. 경찰서에 가야 한다. 고등학교때 주민등록증 발급 받으러 파출소에는 가봤는데, 경찰서라니 태어나서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나에게 경찰서라니, 괜히 죄 지은 것도 없는데 겁부터 났다. 경찰서 가기 두렵다고, 개명신청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 뭐, 경찰서가 어떤 곳인지 구경이나 한번 해보자고 괜한 허세를 부리면서 경찰서로 향했다.

 

그런데 죄진 것도 없는데, 막상 경찰서에 들어가려고 하니, 사람들이 나만 쳐다 보는 거 같아 이리저리 기웃거리고만 있었다. 그때 정문에서 지키고 있던 경찰관이 "무슨 일 때문에 오셨습니까?" 그냥 범죄경력회보서 받으러 왔다고 하면 되는데, 순간 그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점점 주눅이 들어가고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개명신청 땜에 관련 서류가 필요해서요"라고 말했다. 그제서야 경찰관은 웃으면서 "이렇게 저렇게 가면 전산실이 있는데, 거기서 하면 됩니다"라고 친절하게 알려줬다. 들어가지 못하고 서성거리는 날 보면서 무슨 죄가 있어 왔나 싶었는데, 막상 별것도 아니면서 들어가지 못하는 나를 보니 웃음이 난 거 같다.

 

그런데 경찰관 아저씨의 말을 좀 새겨 들을걸. 사람들이 나만 보는 거 같아 거기에만 신경 쓰느라 제대로 못 듣고 건물 안으로 들어오니, 알려준 그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내 눈 앞에는 형사과장 방, 무슨 형사 방 등등 내가 들어가서는 안될 곳들만 보이고 정작 전산실은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었다.

 

'누구한테 또 물어보기 싫지만,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그런데 여기는 에어컨을 이렇게 세게 틀었나? 시원하다 못해 너무 서늘하잖아' 속으로 이러면서 다시 정문에 있던 경찰관에서 가서 물어봤다. 그래도 구면인지라 편할 거 같기에 말이다.

 

경찰서가 'ㄷ'자형 구조로 되어 있는데, 거기를 돌고 또 돌아야 전산실이 나온다는 말에, 새겨 듣고 그대로 실행했다. 오호, 다행히 전산실을 찾았다. 조심스럽게 여기가 거기냐고 물어보니, 맞는단다. 왜 왔는지 이유를 알려주니, 맞은편에서 신청서를 기재라고 오면 된다고 해서, 후다닥 작성하고 드렸다.

 

뻘쭘하게 서서 기다리는데, 왜 그리 긴장이 되던지, 무슨 범죄자가 된 듯한 느낌에, 범죄경력회보서를 본 형사가 달려와 나에게 수갑을 채우는 건 아닌지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목이 타고 등줄기에 땀이 흐르고, 10분의 시간이 엄청 더디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결과는 완전 무결한 시민이었다. 10분간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구나 했다. 수수료를 내려고 하니, 0원이란다. 감사하다고 크게 인사를 하고 바로 뛰어 나왔다. 나오면서 죽을 때까지 오고 싶지 않은 곳이구나 했다. → 요즘에는 범죄경력회보서를 굳이 본인이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법원에서 경찰서로 직접 요청한다고 한다. 이거 땜엔 경찰서 가는게 참 힘들었는데, 이제는 갈 필요가 없어졌구나. (변경된 내용이 있어 바로 잡습니다. 변경됐다고 댓글로 남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 길로 지방법원에 가서 신청을 했다. 결과는 3개월 후에 나온다고 하니, 이젠 기다리면 되는구나. 그리고 3개월 후 당당히 빼어날 수가 들어간 내 이름을 찾았다. 드디어 원래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름이 바꾸고 나면 해야 할 후 작업들이 많다. 우선 주민등록 등본과 같은 서류에 바뀐 이름으로 신청해야 하고, 은행이나 의료보험 등 여러 곳에 가서 변경 신청을 해야 했다. 그런데 나는 별로 할 게 없었다. 한자만 달라졌기에, 주민센터에게 달라진 한자로 변경신청하고, 인감증명서도 이때 드디어 만들게 됐다.

 

다른 곳들은 굳이 변경할 필요가 없기에, 안 했다가 몇 년 후 여권을 재발행 할 때 사건이 터졌다. 담당직원이 "개명 신청하셨어요?" 이 말을 듣는 순간, 그때 개명신청 완료 후 받은 안내서에 언제까지 변경이 됐다는 걸 신고해야 한다고 했는데, 여권을 생각하지 못한 거였다. "저, 한자어만 바뀐 거라서, 이름은 지금과 동일한데요"라고 말하니, 잠시 서류를 보던 직원이 별 말 없이 재발행을 해줬다. 솔직히 여권에는 한자 이름이 들어가지 않으니깐, 굳이 변경신청을 할 필요는 없었다.

 

개명신청을 했지만, 주변 사람들은 내가 개명신청을 했는지 모른다. 하긴 나도 잊고 있었으니 말이다. 필요할거라 생각해서 만들었던 인감증명서와 비싼 도장은 그냥 책상 서랍 구석에 잠들어 있다. 도장보다는 사인을 주로 하기에 달라진 한자이름을 보여줄 일이 없으니 말이다. 그래도 원래 내 이름을 다시 찾았다는 데에 의미를 두고자 한다. 그래도 경찰서 구경도 하고, 법원 구경도 했으니, 나름 나쁘지 않았던 추억이라 해두자. 비용은 주민센터에서 서류 요청할 때 드는 수수료와 법원에서 인지세, 송달료 등등 해서 3~4만원 정도 했던 거 같다. 3개월의 기다림이 살짝 지루하고, 안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도 있지만, 예전보다는 개명신청의 눈높이가 많이 낮아졌다. 왜냐고, 내가 됐으니깐.

 

 

다음 모바일 투데이 베스트로 선정(2014110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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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까칠양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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