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풍경/in seoul2015.10.13 07:30



참 부끄러운 일이지만, 이작가 이박사의 이이제라는 팟캐스트가 없었다면 정확한 우리 근현대사를 몰랐을 것이다. 국정교과서에 나온 내용이 전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너무 늦게 알아버려서 창피하지만, 지금이라도 제대로 알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서울에 있는 독립운동가 기념관을 지난 3월에 다 다녀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심산 김창숙 기념관과 우당 이회영 기념관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서울고속터미널로 가는 버스에서 수십번도 더 들었던 심산문화센터 정류장이 바로 심산 김창숙 기념관이라는 사실, 이런 바부. '너무 늦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유림의 독립운동을 주도한 마지막 선비 심산 김창숙 선생을 만나러 가자. 



총 3층 건물로 전시실은 1층에 있다. 나머지는 교육실, 대강당, 독서실 등이 있다. 관람시간은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관람료는 무료다. 그리고 공휴일은 휴관, 관람시 주차는 무료라고 한다.



입구에서 만나는 심산 김창숙선생의 사진과 어록이다.

『오직 의 소재를 보아서 그 의에 편안하여, 놀랜 물결이 저절로 가라앉기를 기다릴 뿐이다.』

『나는 대한 사람으로 일본 법률을 부인한다. 일본 법률론자에게 변호를 위탁한다면 대의에 모순되는 일이다.』

『성인의 글을 읽고도 세상을 구제하던 성인의 뜻에 깨우침이 없으면 이는 거짓 선비이다.』



심산 김창숙선생(1879~1962)은 80평생 민족과 국가의 불행한 운명 속에서 반(反)침략 항일투쟁 / 반분단 통일정부수립운동 / 반독재 민주투쟁 등 투쟁과 희생으로 일생을 바친 분이다. 선생은 올곧은 선비이자 독립운동가다.



전시실 입구에 있는 심산 김창숙선생의 영정사진이다. "늦게 찾아뵈서 죄송합니다." 전시실은 6개 테마로 구성되어 있다.



첫번째 공간은 선생의 영정사진과 연보 그리고 왼쪽에 보이는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두번째 공간은 선생의 출생과 어린시절 그리고 한주학파와 유학사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유품으로 1946년 7월 거행된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삼의사 국민장을 맞이하여 세 의사의 넋을 기리기 위해 작성한 삼의사 제문과 그리고 성균관대학교 이사회에서 이사 승인을 위해 문교부에 제출한 선생의 자필 이력서 등이 있다.



김창숙(金昌淑)은 1879년 7월 10일(음)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동 사월리(沙月里, 사도실)에서 부친 김호림(金護林)과 모친 인동 장씨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자(字)는 문좌(文佐), 호(號)를 직강(直岡), 심산(心山), 벽옹(?翁)이라고도 불렀다. 갑오년 동학혁명을 즈음하여 서당의 학도들과 함께 부친의 엄명으로 농부들과 같이 모내기를 하고 그 자리에서 문벌과 계급타파 등 사회변혁에 대한 부친의 소견을 들었는데, 이에 감명 받은 심산은 선각적 지식인으로서의 포부를 지니게 되었다. (출처- 심산기념사업회)



1896년 18세 때 부친상을 당한 심산은 이종기(李鍾杞), 곽종석(郭鍾錫), 이승희, 장석영(張錫英) 등 당시 석학(碩學)들의 문하를 두루 찾아 경서에 대해 질의하였는데, 이승희를 각별히 따랐다. 그는 영남의 문벌사족(門閥士族)인 의성 김씨(義城金氏) 중에서도 조선 중기의 명현(名賢) 동강(東岡) 김우옹(金宇?)의 13대 종손으로 남다른 지위와 명망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 명문 가문의 출신으로 일제하에서 안일한 삶을 누리던 양반지주들이 많았건만 심산은 젊은 시절부터 모든 것을 뿌리치고 구국활동(救國活動)에 투신하여 스스로 고난의 행로를 택하게 된다.



선생의 애국계몽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세번째 테마.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심산은 스승인 이승희와 함께 상경하여 이완용(李完用) 등 오적(五賊)을 참형에 처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그 뒤 일진회(一進會) 매국도당들이 한일합병론을 제창할 때에는 “역적을 치지 않는 사람 또한 역적이다”라는 격문을 돌리고 동지를 규합하여 중추원(中樞院)과 일간 신문에 성토문을 보냈다. 이 사건으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성주경찰서에서 8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한편 대한협회(大韓協會) 성주지부(星州支部)를 조직하여 “나라를 구하려면 모든 구습을 개혁해야 하고 구습의 개혁은 계급타파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라고 주창하였다. 또한 단연동맹회(斷烟同盟會)를 통한 국채보상 운동을 전개하고, 선조(先祖) 김우옹을 모신 청천서원(晴川書院)에 성명학교(星明學校)라는 사립학교를 설립하여 신교육 운동을 펼쳤다. 



파리장서, 독립군 기지 건설과 제2차 유림단 의거 그리고 체포와 옥중 투쟁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 4번째 테마.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3·1운동을 목격한 김창숙은 민족대표에 유림이 참여하지 못한 것을 통탄하며, 곽종석, 김복한 등 유림 137인이 한국의 독립을 청원한 파리장서를 작성해 중국으로 망명했는데, 상하이에서 이를 번역하여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고, 국내외에도 배포했다.


『지금 광복운동을 인도하는 데에 오직 세 교파가 주장하고 소위 유교는 한사람도 참여하지 않았다. 세상에 유교를 꾸짖는 자는 쓸데없는 유사는 더불어 일하기가 부족하다 할 것이다. 우리들이 이런 나쁜 명목을 뒤집어썼으니 무엇이 이보다 더 부끄럽겠는가? (이미지 속 글)』



정파리 평화회의서.

이 파리 장서 사건은 조국독립을 세계에 호소하여 일제의 잔학상을 폭로하였으며 세계에 한국의 존재를 알린 유림 최대의 독립운동이었다. 이런 움직임을 뒤늦게 인지한 일제(日帝)는 곧 국내 유림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활동을 벌여 500여 명을 체포하였는데, 이것이 이른 바 ‘제1차 유림단 사건’이다.



1919년 3월 27일 파리장서를 소지하고 상하이에 도착한 심산은 파리로 가는 대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항일독립운동을 시작했다. 심산은 임시의정원 의원에 피선되어 임시정부의 기초를 수립하고 각지 임시정부와의 통합에 참여하였고, 1920년 박은식과 사민일보를, 신채호와 천고를 발간해 독립운동을 선전했다.


상하이를 떠나 베이징으로 활동지를 옮긴 김창숙은 이회영, 신채호와 교류하면서 독립운동을 모색했다. 이승만의 위임통치론을 비판하는 성토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사진 속 인물은 박은식, 이회영, 이시영, 이동녕, 김구, 신채호(윗줄 왼쪽부터).



1919년 심산은 쑨원을 면담하여 독립운동 지원을 약속받았으며, 중국인들과 중한호조사를 조직하고 한국 학생들의 중국 유학을 주선하고 지원했다. 1925년 봄 심산은 이회영과 내몽고의 황무지를 개간하고, 만주의 한인들을 이주시켜 독립군을 양성할 계획을 세웠다. 8월 심산은 직접 국내로 잠입해 유림들을 중심으로 모금하였으나, 일제의 추적으로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모금에 참여했던 유림들이 대거 체포되어 투옥되었는데, 이를 제2차 유림단 사건이라 한다.



나석주 의거.

상해로 돌아온 심산은 이동녕(李東寧)·김구(金九) 등에게 자신이 본 국내의 정세를 설명하고 향후 대책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모금해온 자금이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는 비용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니, 우선 모금한 기금으로 직접적인 의열(義烈) 투쟁을 벌여 일제 기관과 친일 부호에게 물리적인 타격을 가할 것을 제안했다. 심산은 유자명(柳子明)과 상의하여 무기를 구입한 뒤 그와 함께 의열단(義烈團) 단원 중에 일을 맡길 만한 사람으로 한봉근(韓鳳根)·나석주(羅錫疇)·이승춘(李承春) 등을 선발하였다. 심산은 무기와 자금을 나석주 등에게 건네주면서 독립운동의 역사 위에 영원한 빛이 되라고 격려하였다. 나석주 등은 즉시 위해위(威海衛)로 가서 배편을 이용해 입국하기로 하였다. 이때가 1926년 5월이었다.


그런데 7월이 될 때까지 마땅한 입국 방법을 얻지 못하자, 나석주 혼자서 무기를 휴대하고 경성으로 잠입하였다. 나석주는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뒤 다시 권총으로 직원과 경찰 간부 등 일본인 여러 명을 쏘아 죽이고, 교전 중 마지막 수단으로 자결하였다. 나석주의 장렬한 행동은 국내외의 모든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과 함께 새로운 용기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옥중투쟁.

1927년 지병이 악화되어 치료를 받던 심산은 맏아들 환기(煥基)의 사망 소식을 접한다. 국내에 보냈던 아들이 일경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출옥 후 사망한 것이다. 건강 상태가 더욱 악화된 심산은 상해 공동조계의 공제병원(共濟病院)에서 입원 치료를 받았다. 심산의 행적을 계속 추적하던 일제는 첩자를 통해 신병을 파악하고 병원에 들이닥쳐 심산을 검거하였다.


재판 과정에서도 무료 변론을 자청하는 한국인 변호사들에게 “나는 대한 사람으로 일본의 법률을 부인한다. 일본의 법률을 부인하면서 만약 일본 법률론자에게 변호를 위탁한다면 얼마나 대의에 모순된 일인가? 나는 포로다. 포로로서 구차히 살려고 하는 것은 치욕이다.”라고 하면서 거절하였다. 1928년 14년형을 선고 받은 심산은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어 복역하였다. 옥중에서도 심산의 투쟁은 계속 이어졌다. 일본인 전옥(典獄)에게 절하지 않았고, 읽기를 강요하는 최남선(崔南善)의 「일선융화론(日鮮融化論)」을 찢어버리기도 하였다. 심산의 의지를 일제도 어찌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병세가 위중해지자 1934년 일제는 가출옥을 허용하였다. 심산은 1929년에도 위독하여 형집행 정지로 가출옥되었다가 재수감된 일이 있었다. 출옥 당시 이미 중병을 얻어서 불구의 몸이 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벽옹(?翁-앉은뱅이)’이라고 부르자 스스로도 이를 별호로 썼다.


『 고문하는 자들에게

조국의 광복을 도모한 지 십여 년

가정도 목숨도 돌아보지 않았다.

뇌락한 나의 일생 백일하에 분명하거늘

야단스럽게 고문을 벌일 필요가 무엇이뇨.』

이 시를 읽은 일본인 고등과장은 심산에게 절까지 하였지만, 일제는 그의 의지를 꺾고자 고문을 지속했다고 한다.



반귀거래사(反歸去來辭)  


돌아갈꺼나! /歸去來兮

전원이 이미 황폐하니, 어디로 돌아가리? /田園已蕪將安歸

조국의 광복에 몸을 바치매 /余旣獻身兮光復役

뼈가 가루된들 슬플까 마는 /縱粉骨而奚悲

모친상 당하고도 모른 이 몸은 /有母喪而不知

되돌리지 못하는 불효에 울뿐! /痛不孝之莫追

이역만리 갖은 풍상 다 겪으면서 /飽風霜於異域

나날이 그르쳐가는 대업 탄식하다가 /嗟志業之日非

문득 크나큰 모욕을 받아 /身旋陷於大僇

죄수의 붉은 옷 몸에 걸쳐도, /穿虜犴之赤衣

고생을 달게 받아 후회는 없고 /忍苦辣而不悔

행여 도심(道心) 쇠해질까 걱정했노라. /懼道心之或微

눈앞에 고향을 바로 두고도 /鄕山在望

쇠사슬에 묶기어 가지 못 했네 /繫械莫奔

앉은뱅이 되어서야 옥문 나서니 /癈疾而躄, 始出牢門

쑥밭된 집안에는 남은 것 없고 / 室廬蕩殘, 舊物無存

농사 아니 지으니 무엇 먹으며 / 不農奚餐

빚을 수도 없으니 그 무슨 술 마시리. /不釀奚酒

친척들도 모두들 굶주려 하니 /親戚亦其窮餓,

솟구치는 눈물이 얼굴을 가리네. /釀危涕而被顏

아내도 집도 없어진 지금 /旣靡室而靡家

어느 겨를 일신의 안정 꾀하리./ 寧遑謀於奠安

음험하기 짝 없는 사람들 있어 /紛鬼蜮之恠物

내 고향의 날뜀을 봐야 했어라. /任跳梁於鄕關

삼팔선이 나라의 허리를 끊고 /哀三八之斷腰

그 더욱 슬픈 것은 동족의 무덤 / 最傷心於京觀

모략 받아 죽은 이들 너무나 안타까와 /歎明夷之入地

하늘 우러러 하소연한들 그 누구 돌아오리 /仰皓天而不還

아! 거의 다 죽어가는 병든 이몸엔 /噫垂死之病夫

아무리 둘러봐도 어정댈 한 치 땅도 없도다. /顧無所於盤桓


돌아갈꺼나! /歸去來兮

돌아가 세상과의 연을 끊으리. /從此息交而絕遊

세상 우습게 알아 감은 아니어도 /非傲世而長往

부귀영화 내 뜻이 아님이어라. /寔榮貴之無求

그러나 늙고도 창창한 마음 / 髮雖短而心長

나라 일만 걱정되고 안타까웁고, /惟天下之是憂

노복을 불러 봐도 안 나타나니 /呼長鬚而不見

서쪽 밭에 밭갈 일 누구와 상의 하리. /孰問耕於西疇

물결에 몰아치는 바람 사나워 /湖海颶急

외로운 배 노마저 꺾이었나니 /棹折孤舟

저기 저 치솟은 건 무슨 산이뇨 /直峻何山

머리 두고 내가 죽을 고향 쪽 언덕./是吾首邱

고향 쪽 바라보며 차마 못가니 /望岡臺而迍邅

세월은 물같이 빨리 흐르고 /歲華忽其如流

안타까와 맑은 샘물 손에 떠들고 목 늘여 어정이느니 /挹晴川而延竚

늘그막에 편히 좀 쉬었으면 싶어도 /庶嚮晦而宴休

비웃고 조롱하는 나쁜 무리들. /奈捓揄之惡倀

나로 하여 고향에 머물게도 하지 않아 /不俾我而淹留

그 어찌 마음 조여 갈 곳 몰라 함이리 /胡爲乎跼蹐迷所之

남북을 몰아치는 흑풍 사나워 /南北黑風惡

화평을 이룩할 기약 없으니 /和平未易期

저기 저 사이비 정인군자를 /彼叢莠之亂苗

죽는 대로 이 땅에서 쓸어버리리. /竭蹶而耘耔矢

길에서 죽기로니 무슨 한이리 /死道路兮亦何恨

가만히 외어보는 위후의 억시 /誦衛候之抑詩

해처럼 밝디 밝은 나늬 마음은 /皦白日之此心

귀신에게 물어봐도 떳떳하도다 /質諸鬼神可無疑 



해방 후 통일운동과 반독재 투쟁 테마.



통일정부 수립운동.

조국이 광복되자 심산은 무엇보다도 민족의 분열을 경계했다. 반드시 우리의 힘으로 통일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우후죽순처럼 난립하는 60여 정치단체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그의 지인들이 조직한 민중당(民衆黨)의 당수 추대도 거절하였다. 하나의 민족이 분열·대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심산에게는 지상(至上)의 원칙이며 도덕률(道德律)이었다. 


심산은 난립하는 어떤 정파에도 참여하지 않는 한편, 기선을 잡고자 발 빠르게 나서는 인민공화국 선포에도 반대하면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뭉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신탁통치 찬반 문제, 미소공위 참가 문제 등에서 좌익은 물론 이승만을 비롯한 우익 인사들과도 뜻이 맞지 않아 항상 소수파의 고립적 입장을 면할 수 없었다.


1946년 심산은 정부 수립을 위한 28인의 최고정무위원(最高政務委員)에 뽑혔으나 이 기구가 미군정사령관 하지의 자문기관인 민주의원(民主議院)으로 전락하자 이승만과 대립하여 곧 탈퇴하였다. 민족의 분열과 분단의 조짐을 외면할 수 없어 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홍명희(洪命憙)·조소앙(趙素昻)·조성환(曺成煥)·조완구(趙琬九) 등과 함께 이른바 ‘7거두(七巨頭) 공동성명(共同聲明)’을 발표하여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명분과 대의를 앞세우는 외로운 투쟁은 권력욕에 휩싸인 외세 결탁 세력에 의해 번번이 좌절되었다. 결국 한반도에 두 개의 정부가 세워짐으로써 조국은 남과 북으로 갈리었다. 심산은 비통과 격분 속에 두 정권의 수뇌를 향한 신랄한 비판과 미·소 양군의 철수를 시와 성명 등을 통해 극력 주창하였다. 심산은 분열을 꾀하는 자들을 민족반역자로 단죄하여 강력히 비판했으며 또한 이들과 타협하지 않고 끈질긴 저항으로 맞섰다.



민주화 운동.

'남한 단독총선 반대’ 등 끊임없는 반(反)분단 투쟁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조국은 분단되고 이승만의 독재는 도를 더해 갔다. 김구를 비롯한 많은 지도적 인사들이 암살되는 정국의 혼란 속에서 친일파가 다시 정권과 유착하여 실세가 된 마당에 심산은 이제 이승만 정권의 부패와 독재에 정면으로 맞섰다. 이 대통령 하야 경고문, 부산 피난지에서의 국제구락부 사건 주동, 이승만 삼선(三選) 취임 반대, 보안법 개악 반대, 민권쟁취 구국운동 등 외로운 싸움으로 탄압과 옥고를 반복해 치렀다.


심산은 1956년 부정 선거로 3선 취임한 이승만에게 “이제 전국의 민심은 이미 떠났다. 이번 부정선거를 무효로 선언하고 전국적 재선거를 특명 실행함이 대통령의 가장 급무(急務)이며, 이것이 민심 회복의 유일무이한 방법이다”라고 정면으로 비판하였다. 이에 자유당 정권은 관권과 폭력을 동원하여 성균관, 유도회를 점령하고 심산을 일체의 공직에서 추방하였다.




광복 후 심산은 유림계의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자 했다. 1947년 전국 유림대회를 통해 성균관의 명칭을 환원하고, 교화사업 기구로 유도회를 설치하였다. 심산은 유도회 총본부 위원장, 성균관장에 선출되었고, 유학 정신을 건학이념으로 하는 성균관대학을 설립하고 초대 학장, 총장을 지냈다고 한다.


심산은 독립운동으로 남편을 잃은 며느리에게 재가를 하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진정한 유림이자 개방적인 선비가 아니라면 할 수 없었을 행동이다. 그러나 며느리는 끝까지 시아버지를 모셨다고 한다.



심산 김창숙 선생은 1962년 5월 10일 84세로 생애를 마감했다. 돌아가시 2년 전, 심산은 백범 김구 암살의 진실을 알아내고자 했다. 그 결과 백범 김구 암살은 안두희의 단독범행이 아니라 그 뒤에 수많은 의혹들과 권럭자들이 연관되어 있다는 걸 파헤쳤다고 한다. 선생이 아니었다면, 영원히 묻혔을 진실일 것이다. 어떤 진실이든, 꼭 밝혀내야 한다.



1960년 4월 19일 피의 화요일(4·19혁명), 심산 김창숙선생의 건강이 좋았다면, 연세가 많지 않았다면... 부질없는 이야기이지만, 그랬다면 지금과 많이 다른 오늘을 맞이했을 거 같다. 역사에는 만약이 없다고 하지만, 우리의 근현대사를 바라보면 아쉬운 순간들이 너무나 많다. 심산 김창숙선생은 돌아가시기 전까지 서울에서 집 한 칸도 없는 곤궁한 생활 속에 여관과 병원을 전전하는 처지가 됐다고 한다. 우리 독립운동가의 마지막은 언제나 참 슬프다. 나라의 독립만을 위해 목숨까지 받쳤는데, 해방된 나라는 그 사람들을 홀대했으니 말이다. 여전히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어려운 생활을 그와 반대로 친일파 후손들은 잘 살고 있으니, 이거 하나만으로도 잘못된 세상임을 증명하는 거 같다.



『통곡 효창원

효창원에 쓰라린 바람 일고 처절한 비 내리는데

통곡하며 부르노라. 일곱 선열의 영혼을.

땅속에 묻힌 말라버린 뼈

일찍이 무슨 죄로

네 멋대로 공병대의 괭이 아래 파 뒤집혀야

한단 말이냐.


저 남산의 탑동 공원을 돌아보니

하늘을 찌르는 동상이 사람의 넋을 빼앗는구나.

독재의 공과 덕이 지금은 이렇듯 높을지나

두고 보시오!

창상이 일순간에 벽해로 뒤집힐 것을.』


"꼭 두고 보겠습니다. 창상이 일순간에 벽해로 뒤집히는 순간을..." 아프고 슬픈 역사를 굳이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칠 필요는 없다. 밝고 긍정적인 역사만 알려줘야 한다. 아니다. 역사는 정확히 알려줘야 한다. 그래야 또 다시 잘못된 길로 가지 않을 테니깐 말이다. 





■ 심산 김창숙선생에 대해서 더 알고 싶다면...

이작가 이박사의 이이제이 팟캐스트

심산 김창숙 기념관 홈페이지 


■ 서울에서 만날 수 있는 독립운동가 기념관 및 유적지 

2015/02/27 - 3·1절 시리즈 1화 - 백범 김구 기념관 (까칠양파의 서울 나들이 ep27)

2015/03/02 - 3·1절 시리즈 2화 - 효창공원 (까칠양파의 서울 나들이 ep28)

2015/03/04 - 3·1절 시리즈 3화 - 안중근의사 기념관 (까칠양파의 서울 나들이 ep29)

2015/03/05 - 남산 백범 광장 & 한양도성 성곽길 맛만 보기!! (까칠양파의 서울 나들이 ep30)

2015/03/09 - 3·1절 시리즈 4화 - 매헌 윤봉길의사 기념관 (까칠양파의 서울 나들이 ep31)

2015/03/10 - 3·1절 시리즈 5화 - 도산 안창호 기념관 (까칠양파의 서울 나들이 ep32)

2015/03/11 - 3·1절 시리즈 6화 - 경교장 京橋莊 (까칠양파의 서울 나들이 ep33)

2014/04/04 - 아픈 우리의 역사지만, 잊혀져서는 안 될 서대문 형무소

2015/10/07 - 국립 4·19 민주묘지 - 학생과 시민들이 이룩한 승리의 역사!! (까칠양파의 서울 나들이 e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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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까칠양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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