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에세이2015.12.22 07:30


본 사진은 내용과 버스라는 공간만 관련있습니다.

팟캐스트를 통해 듣고 있는 컬투쇼, 특히 수요일에 하는 사연 진품명품은 무조건 빠뜨리지 않고 듣는 편이다.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듣다보면, 나도 모르게 빵터지는 바람에, 옆에 있는 분에게 피해를 주기도 하지만, 웃음이 사라진 요즘 껄껄 웃게 만들어 주는 매력적인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한다. 생리현상에 대한 엄청난 사연을 듣다보면, 나는 왜 그런 일이 없었을까? 


나도 아침에 엄청 찬 우유 1,000cc를 벌컬 들이마시고 출근해 볼까? 그럼 지하철에서 분명 사건이 일어날테고, 그걸 사연으로 보내면 소개가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만약 정말 했다면, 사연은 커녕 지하철 설사녀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과감히 포기를 했었다. 그리하여 난 운이 없구나, 이렇게 재미난 사연도 다 운이 있어야 되는구나 하고 맘을 접었다. 그리고는 그들이 읽어주는 재미난 사연에 빵빵 터지는 리액션으로 보답을 하고 있는 중이다.


컬투쇼 사연 진풍명품을 들으면, 생리현상에 대한 사연도 있지만, 할아버지 목소리 연기가 독보적인 정찬우씨(오빠, 형, 형님, 아저씨, 뭐가 좋을지 모르겠다)가 들려주는 할아버지 사연도 있다. 그렇게 재미난 사연도 아닌데, 찬우형님이 읽으면 훨씬 더 찰지게 들리는 할아버지가 주인공인 사연, 오호라 나에게 행운이 다가왔다. 드디어 만났기 때문이다. 찬우형님이라면 훨씬 더 재미나게 만들어 줄 에피소드가 말이다.



그날은 겨울봄같은 참 포근한 날씨였다. 000번 버스, 붐비는 버스가 아니어서 뒷자리에 앉아도 되건만, 이상하게 운전자 바로 뒷, 즉 맨앞자리에 앉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할아버지를 만나기 위한 누군가의 계시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맨앞자리에 앉았고, 도착하려면 약 한시간 정도 더 가야 하기에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원래는 게임을 해야 하지만, 엄청난 스피드를 보여주는 밧데리 방전으로 인해 때아닌 독서를 즐기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두 정류장을 갔을까? 문이 열리네요~ 그대가 아니 할아버지 한분이 들어오셨다. 아니다. 우선 목소리부터 들려왔다.


"기사님, 내가 다리가 불편해서... 아이고 고맙습니다. 이렇게 기다려주니 아이고 고맙습니다."

커다란 지팡이가 먼저 보이더니, 다리가 불편해 보이는 할아버지가 천천히 정말 아주 천천히 3개 정도 되는 버스 계단을 1분이 넘도록 조심스럽게 올라오셨다. 입으로는 고맙다. 내가 다리가 불편해서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버스에 올라 타셨고, 빈자리를 찾아 안으로 더 들어가야 하지만, 어르신은 내 맞은편 맨앞자리에 있던 여성분에게 눈빛을 발산하셨다. '일어나, 넌 뒤로가.' 눈치를 챈 그녀는 일어서서 뒤에 있는 자리로 갔고, 어르신은 나와 같은 맨앞자리에 앉게 되었다. 즉, 나와 어르신은 버스 맨앞자리에 앉은 것이다. 나는 운전석 뒤, 어르신은 내 맞은편.


커다란 지팡이, 정확한 명칭은 모르지만 할아버지들이 자주 쓰는 짙은갈색 모자 그리고 모자와 비슷한 색상인 콤비 자켓에 골덴바지 끝으로 큼지박한 안경까지 이상은 곁눈질로 살펴본 할아버지의 모습이다.


처음에는 아무렇지 않게 흘깃 쳐다보고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역시나 할아버지도 창밖만 보면서 조용하게 계셨다. 그런데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고 나는 책을 덮고 서둘러 수첩과 볼펜을 꺼내야 했다. '그래 이거다, 나도 컬투쇼에 사연을 보낼 수 있는 장면을 드디어 목격하는 구나.'


조용히 계시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랩을 하기 시작하셨다.

"이렇게도~ 한해가~~ 가는구나. 세월~~~ 진짜 빠르구나~" (사극에서 양반이 시조를 읊는 장면을 생각하시길, 청산리~ 벽계수야~~)


이렇게 한번으로 끝났다면, 사연도 포스팅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곧이어 할아버지는 "음~~험~~~ 음~ 음~~"으로 준비를 하더니, 듣도 보지도 못한 노래를 콧노래로 흥얼거리기 시작하셨다. 할아버지의 음성은 버스기사가 틀어논 라디오보다, 정류장 안내 음성보다 더 크게 버스 안을 울렸다. 고요했던 버스 안은 할아버지의 리사이틀로 인해, 여기저기 키득키득 소리만 날 뿐, 누구 하나 그만하세요 라고 말한 사람은 없었다. 


잠깐 공연이 멈췄는데, 할아버지 옆에 서 있던 누군가의 통화때문이었다. 자신보다 목소리가 더 크다는 걸 인식했는지, 아니면 전화할때는 조용히 해야 한다는 걸 아셨는지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지셨다. 그 누군가의 통화는 계속 됐지만, 뒷자리에 자리가 나는 바람에 그곳으로 이동을 했고, 할아버지의 공연은 트로트로 추정되는 노래로 다시 재개되었다. 


그간의 과정을 메모하면서, '좀 부족한데, 여기서 임팩트있게 뭐가 나와줘야 하는데 아 부족해, 이건 만으로는 라디오에 사연을 보낼 수 없는데' 하면서 계속 곁눈질로 할아버지를 쳐다봤다.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 버스 안에 사람이 많아서 일까? 다시 할아버지는 공연을 멈추셨다. '이제 끝났구나. 내 헛된 꿈은 날아갔구나' 하면서 가방에 수첩과 볼펜을 넣고 다시 책을 펼쳤다. 


할아버지의 침묵은 얼마가지 못했다. 또다시 들려왔다. 이번에는 떼창이 가능한 노래로 말이다.

"계수나무 한나무 토끼 한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푸른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어디서 들어본 노래인데, 뭐지? 동요인거 같은데, 계수나무 한나무인가?' 아, 진짜 아는 노래덴.'


이번엔 무한반복이다. 돌림노래도 아닌데, 계속 계수나무, 토끼, 푸른하늘 은하수만 들려온다. 처음에는 구슬프고 처량하고 인생의 단맛, 쓴맛, 매운맛, 신맛을 다 맛 본 분이 부르는 노래라 역시 다르구나 했다. 그러나 무한반복으로 인해 늘어난 테입처럼 점점 늘어져갔고 더불어 버스 안 공기까지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의 무한반복은 끝이 안 날줄 알았다. 그러나 목적지에 도착한 할아버지는 탔을때처럼 "기사양반, 내가 다리가 불편해서, 에구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를 또 반복하더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버스에서 내리셨다. 


할아버지가 내린 후 버스는 다시 고요해졌지만, 나는 눈물(?)이 났다. 왜냐하면 너무 약했기 때문이다. 이 사연을 정리해 컬투쇼에 사연을 보냈고, 운 좋게 찬우형님이 읽었다고 치자, 분명 이런 결론을 내릴 것이다. "(사연종이 구겨지는 소리와 함께)전 500원이요. 착불로 보낼테니 선물 받으세요." 


아쉽다. 아쉬어, 참 아쉽다. 반달대신 빙뱅의 거짓말이 나왔다면 대박이었을텐데, 'I`m so sorry but I love you 다 거짓말 이야 몰랐어 이제야 알았어.' 역시 나에게 요행은 없나보다. 처음부터 사행심에 빠져버린 내 잘못이다. "할아버지의 순수한 동심(?)을 돈으로 생각한 저를 용서해 주세요."



잠깐만, 할아버지가 부르셨던 계수나무 한나무는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동요인 반달이라고 한다. 윤극영 작사작곡으로 일제강점기인 1924년에 나온 노래다. 나도 아는 노래였는데, 솔직히 제목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나 오래된 노래였다는 사실도 이번에 다시 알게 됐다. 


반달 1절 가사- 푸른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 계수나무 한나무 토끼 한마리 / 돛대로 아니 달고 삿대로 없이 /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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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까칠양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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