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풍경/in korea2016.06.10 07:30


역사에 관심이 많은 나. 목포에 왔으니 우선 순위로 가야 하는 곳, 목포근대역사관. 입에서는 '이런 C~' 욕이 나오지만,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위해서라도 봐야 한다. 국정교과서 세대로, 근현대사는 기말고사가 끝나고 난 후에야 배웠던 부분이라, 그때는 잘 몰랐다. 그렇다고 계속 모르고 있으면 안된다. 국사교과서에서 알려주지 않았던 진실, 이제는 스스로 찾아서 배울란다.



목포근대역사관이 있던 곳은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했던 곳이었다고 한다. 주변에 일본식 건물이 많다. 더불어 길은 정감가는 우리식 골목이 아닌, 일률적으로 균일하게 만들어진 도로다. 그래서 그런가? 이곳을 향해 걸어오는데, 자꾸만 낯설게 느껴진다. 



역사관 아래 있는 소녀상. 얼마 전 광명동굴에서 본 소녀상과 같은데, 왜이리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는지...



1897년 10월 1일 목포항이 개항되고, 1897년 10월 26일에는 목포일본영사관이 설치되었다. 이 곳은 일본영사관으로 사용하기 위해 1900년 1월에 착공하여 같은해 12월에 완공한 것으로 르네상스 건축양식을 띄고 있다고 한다. 창문 위에 있는 저 표시, 일장기처럼 보인다. 유달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니,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서 얼마나 많은 못된 생각과 짓들을 했을까? 벌써부터 흥분하면 안되는데, 분노게이지가 조절이 안된다.



창문 위 저 동그라미, 포토샵으로 지워버리고 싶다. 그렇게한들 있었던 사실이 없어지지는 않겠지.



입장료는 2,000원(어른)인데, 남도여행 할인꾸러미로 갔더니 50% 할인이 된다. 



붉은 벽돌을 이용한 2층의 르네상스 양식 건물이라고 하더니, 중앙에 2층으로 가는 계단이 있다. 올라갈때 조심해야 한다. 나무계단이라서 삐거덕 소리가 많이 난다. '혹시 내 무게땜에 더 그랬나?'



1층과 2층사이에는 벽돌의 허리 돌림띠를 두었으며, 창문 왼쪽과 오른쪽에 흰색 벽돌을 반듯하게 장식했단다.





천장장식, 벽난로, 거울 등은 건축 당시의 모습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



총 9개의 벽난로가 있었다고 한다. 벽돌 건물이면 따뜻했을텐데, 이렇게 많은 벽난로가 필요했을까? 이걸 치우고 관리했던 사람들은 분명 그들이 아니었을텐데 말이다. 건물 구경은 여기까지, 본격적으로 목포의 근대역사를 만나러~




목포진은 조선시대 수군의 진영이며 우두머리인 만호가 배치되었다고 해서 만호진이라고 했단다. 한반도 서남해 해양 방어진지로써 그역할 다했단다.



1897년 목포는 고종의 칙령에 의해 자주적인 개항을 했다. 개항 이후 목포는 전남 제일의 공업도시이며 부산, 인천, 군산, 신의주 진남포에 이은 무역거점 도시로 성장하게 되었으며 삼백(쌀, 목화, 소금)의 고장으로도 그 명성을 알리게 됐다고 한다. 이래서 일제가 더 극렬하게 수탈을 했겠지.




목포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영사관,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형무소, 목포경찰서 등이 설치되어 억압을 받았으나, 3·1만세 운동, 4·8만세 운동, 청년운동, 부두 노동자 운동, 신간회운동 등으로 항거한 역사적인 고장이다. '앗 내가 나왔네^^'



일제강점기때 목포는 6번째 도시였다고 한다. 그당시 광주는 12번째 도시였다고 한다. 지금은 반대가 됐지만, '목포는 항구다'라는 말, 괜히 나온 말은 아닌 거 같다.



내용을 읽지 않아도, 그래프가 모든 걸 다 말해주고 있다. '이런 XXX~'



남촌은 일본인이, 북촌은 조선인이 거주했다고 한다. 목포가 근대화 도시로 발전하면서, 수탈과 차별은 더 심해졌을 것이다. 이걸 봤는데도, 근대화 도시로 만들어줬으니 고마워해야지... 이딴 말을 하는 인간은 정말 인간도 아니다.



왼쪽부터 냉장고, 손금고, 가스히터, 재봉틀, 벽시계다.



고전영화에서만 보던 유성기도 있다.




1897년 개항 후 기독교와 천주교 그리고 일본 불교인 동본원사가 전파되었고 일본인 자녀들의 교육을 위한 공립심상소학교, 목포여자중학교, 조선인을 위한 문태중학교도 개교하여 종교, 교육, 문화 등 다양한 문물이 전파되었다.



목포에 인력거를 처음 들여온 이는 삼길야 여관의 주인 카사이로서, 그는 1911년 부두와 여관사이에서 손님을 나르기 위해 인력거 한대를 들여왔다고 한다. 인력거 요금은 최저 10전에서 최고 50전까지였으며, 하루종일 빌리는 경우에는 2원이었다. 인력거는 자동차가 본격적으로 운행하기 시작한 1920년 말부터는 점차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목포근대역사관)



1919년 4월 8일 만세운동을 배경으로 당시 교복과 모자, 안경 등 소품이 전시되어 있다. 착용도 가능한데, 소심한 성격 탓에 마음 속으로만 크게 외쳤다.




목포 오거리는 일제강점기 목포의 상업중심지역이었다. 오거리는 목포역, 조선인 마을, 일본인 마을, 목포항으로 이어지는 다섯 개의 길이 교차하는 지점으로 가장 번화한 거리였다고 한다. 호남은행, 동본원사 목포병원, 영화관인 목포극장, 태평관 등도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밖으로 나와 뒷편으로 가면, 방공호가 있다. 피난체험을 할 수 있다고 하는데, 겁이 호기심을 이기는 바람에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구 목포부청 서고. 창고를 석조로 하는 경우는 근대기 일본의 영향이라고 한다.



근대역사를 마주하고 나면 속이 상하고, 가슴이 답답하고, 알 수 없는 분노가 막 끓어오른다. 왜 우리는 슬픈 역사를 갖고 살아가야 하는지, '잘 좀 하시지'. 하지만 그때는 그렇다고 치고, 지금의 우리는 잘하고 있는 걸까? 솔직히 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하늘은 푸르고, 녹음은 짙은데, 내 맘은 회색이다. 그러나 피해서는 안된다. 되풀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까칠양파

티스토리 툴바